2009년 07월 16일
내 마누라 이야기.

그 테스트 내용이 떠오를 때마다 난 피식 웃고 마는데, 왜냐하면 그 테스트가 맞다면 난 진짜 개새끼이기 때문이다. 내 가방은 물건 험히 쓰는 내 버릇의 일방적인 피해자라, 만약 내가 내 가방 대하듯 애인에게 대한다면 아마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을 다룬 사고사례집 전집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사진 찍어 올려놓은 저 가방. 저 가방이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십여년에 걸쳐 내게 온갖 학대를 받아 온 내 마누라다. 애칭은 수류탄, 바랑, 샌드백, etc, etc. 찢기고 구멍 나고 젖고 깔리고 인간을 대상으로 바꾸면 감옥에 백번을 다녀와도 모자를 폭압을 감당해온 역전의 용사.
어쩌다보니 진짜 십년 가량 저 가방을 메고 살았다. 1, 2년을 못보고 지낸 친구를 다시 만날 때 그 친구들이 하는 말도 이젠 익숙하다. '너 아직도 이 수류탄 메고 다니냐?' 그래 임마들아. 아직도 못 헤어지고 악착같이 같이 살고 있다. 녀석들은 패션센스라곤 전혀 없는 친구가 아직도 구질구질한 아이템을 버리지 못하는 나에 대한 비난 겸 푸념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한결같이 오랜 조강지처와 알콩달콩 잘 지내는 나에 대한 친구들의 질투로 보일 뿐이다. 흥. 내가 내 마누라랑 지내는 게 뭐 그리 이상한 일이라고 잔소리는. 내가 너네랑 지낸 것보다도 수류탄이랑 더 오래 지냈어요 요녀석들아.
그 기간 동안 저 가방이 감내해야만 했던 나의 폭력은 어지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몇 군데 찢어진 부분에 꿰멘 자국이 남아 있고 뒷 부분엔 어떤 못된 녀석이 붙여놓은 스티커가 떼어지지 않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뭘 그리 잔뜩 묻히고 다녔는지 수십번을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로 가득하고 색도 군데군데 바래 어떤 부분은 아예 닳아 구멍이 뚫리기까지 했다. 앞 주머니는 찢어진 걸 보수하지도 않은 게 2년 가까이 되어가는 중이다. 어느 엠티에서는 악한 주인의 동기가 소주를 콸콸 부어버리기도 했으니 여간 험한 대접을 받고 지낸 것이 아니다.
육체적 폭력도 심해서, 원통형이라 깔고 앉기도 좋아 아스팔트에 그대로 내던져 진 채 내 엉덩이 무게를 죽 버텨야만 했던 적이야 셀 수도 없고, 폭신폭신해서 의자에 앉아있을 때 껴안고 자기도 딱 좋은 지라 강연 내내 내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거기에 수학여행이니 엠티니 학술답사니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쭉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에서 대부분 뻗은 인간들을 다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불을 꺼야만 직성이 풀리는 습성을 지녀 이불은커녕 배고 잘 베개하나 건사하지 못한 주인에게 언제나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쩌다 dcdc 물건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려서, dcdc가 머리를 빡빡 밀고 다닐 때는 '스님들 바랑 같다'거나 '어느 절에서 훔쳐왔냐'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교장직도 신부님이 맡는 카톨릭계 고등학교에 웬 중대가리가 바랑을 껴안고 다니니 모양새가 좀 우스꽝스러울 거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빡빡머리 dcdc가 이 수류탄을 메고 다니는 모습에 감명을 받은 학교 선배님은 dcdc에게 자청紫靑이라는 과분하기 짝이없는 법명까지 하사해주셨으니 본치 않게 불교계에 끼친 피해도 지극하니 고운 심성에 기스가 많이 났을 거다.
가정폭력 등의 주체가 항상 그러하듯 자기변명을 하자면 '사랑해서 그랬다'라고 할 수도 있고, 가방을 대하는 모습을 통해 애인을 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심리테스트에 대한 대답으로는 '그녀의 독특한 개성에 한번 빠지면 산이든 바다든 북극이든 어디든 함께 하며 10년이 지나든 말든 언제나 한결 같이 사랑한다'라고 좀 심각한 수준의 구라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뭐 그 함께한 10년의 대부분 애인 없이 지내면서 인간도 아닌 가방한테 마누라 마누라 하는 dcdc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냥 애가 인간이 덜 되어서 그렇다가 정답이겠지만.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 수류탄 메고 다닐 거냐는 질문에 '무덤에 메고 들어갈 거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수류탄이 이 가정폭력의 지옥에서 헤어날 길은 10년은 더 요원한 듯 싶다 뭐 여튼 그렇다. 얘가 내 마누라다.
덧//
학기 내내 쓰고 싶은 글이었는데 너무 내 자랑 같아서 미뤄오다 마침 좋은 기회를 만나 이렇게 글을 쓴다. 렛츠리뷰 2주년 이벤트를 노려서 썼다는 오해를 피하고자 변명을 남긴다. 내 사랑의 진정성을 밝히기 위해 이벤트 참가를 하지 말까 고민도 했지만 이 때 안하면 언제 자랑하겠냐는 생각도 들고.
덧2//
엉엉 사진빨 안 받았다-물론 누워있는 사람 이야기는 아닙니다(...)-.
# by | 2009/07/16 01:10 | 일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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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마누라 이야기.
오늘은 재밌는 에세이들이 많네요^^ '자신의 가방을 대하는 태도가 곧 여자친구를 대하는 태도이다' 지금 자기 가방을 다시 한 번 살펴볼 남자분들 좀 계실 듯 하네요. 근데 이거 여자는 해당 안 되는 거죠?...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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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 심리테스트에 뒤통수 맞았음. 그럴듯 한데? 흐흐
시간장소 알려주시면 득달같이 달려나갑죠!
'그녀의 독특한 개성에 한번 빠지면 산이든 바다든 북극이든 어디든 함께 하며 10년이 지나든 말든 언제나 한결 같이 사랑한다'
[다만 독특한 사랑법을 감내해야한다] 를 빼먹으셨어요! (어?)
그런데 여자친구에게 대하는 태도라하면.. 일단 생기면 오래오래~~가는데, 막 홀대하고 내 편한대로해도 되는 여자친구가 필요하것네 ㅋ 성녀로구나~
그런데 마누라가 요새 힘이 빨리 빠져서...ㅠㅠ
근데 저거 메고 새벽에 산에 오르지 마세요.. 오해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