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31일
[해리 파괴하기] 우디와 상수의 간극.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마 시네바캉스에서 막스 브라더스 작품을 쭉 상영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이해영 감독의 GV가 있었어요. 우디 알렌이 말해왔듯 막스 브라더스는 그의 한 축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는데 '한국의 우디 알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지요. 이 질문에 대한 이해영 감독의 답은 '홍상수'였습니다. 꽤나 근사한 답이라고 생각해요. 답이 멋지다는 게 아니라 답에 가깝다는 의미의 근사.
지식인, 남성, 예술가, 섹스 등 다양한 키워드에서 발견되는 기만들에 대한 적나라한 폭로가 그네들에게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젠 너무 흔한 이야기지요. 산수책에서 1+1이 왜 2인지 굳이 증명하지 않듯 이미 당연시되는 공리랄까요. 그 외에도 이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저건 감독 이야기군'하고 이미 선험적으로(...) 결정 지어버릴 페르소나가 항시 그네들 영화의 주역자리를 찜하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우디 알렌은 이런 동일시에 질색팔색을 합니다만 사실이든 아니든 많은 이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요.
[해리 파괴하기]에는 그 모든 요소들이 담겨있습니다. 잘 나가지만 주변 사람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 예술가. 관계한 여성들과의 부끄러운 정사를 낱낱이 판매하는 장사꾼. 파고 들어가보면 '해리'라는 인물은 우디 알렌 자신보다는 [산딸기]에서 차용한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지만 우디 알렌과 홍상수가 애용하는 혹은 곤혹을 겪는 지점 그 자체인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기에 바로 이 '해리'에게서 우디 알렌과 홍상수의 간극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촌스러움이나 위선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혹은 같은 꼬집음이라도 솔직하지 못한 것과 솔직한 척하는 것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해리는 지옥의 맨 마지막 바닥에서 군림하고 있는 자신의 연적을 발견하고 그를 끊임없이 비난하는 동시에 '내가 가장 못되고 성격 나쁘고 더러운 인간이니까 이 지옥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해'라고 말하지요. 조금이라도 더 달라지고 싶은 욕심.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절망. 이런 것들을 포기한 마지막 해리는 진짜로 파괴되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더럽게 촌스러운 욕심을 포기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그 둘의 가장 큰 간극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덧//
그 둘의 간극은 뭣보다 커피숍과 술집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그리고 전 그 '전형적인 술자리'를 너무 너무 혐오하는 지라, 저울추가 한쪽으로 확 기울 수밖에 없답니다 핫핫핫 OTL -자기혐오만큼 나르시시즘적인 것이 없죠. 하지만 전 '전형적인 술자리'는 아예 배제하고 들어가기에.
덧2//
앞의 줄거리 요약에서만큼은 PC함을 포기하겠습니다. 단어를 좀 바꿔보니 작품 분위기에 너무 맞지 않는 듯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부산시네마테크의 원문에서 사용한 표현을 그대로 가져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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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9/08/31 21:04 | 내가 사랑한 우디 앨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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